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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이산과 김홍도

삶의향기/이슈/뉴스 2007/10/01 22:53 by 아쿠아바다
한국은 너무나도 많은 외침을 당한 나라다.
고구려는 강국으로 통일신라에는 외세를 끌여 들였고
고려때는 잠시 복귀하나 싶더니 오히려 거꾸로 가버리는..

일본의 강점기에다 중국의 공정까지
많은 역사가 왜곡되어 왔고 심지어 현재 지금 역사서에도 왜곡된 역사를
어린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그것이 정말인줄 알고 있다.

삼국사기도 삼국유사도 어이 이렇게나 왜곡 되어 왔을까?
정조는 과연 진정한 왕이 되었을까?

정조와 김홍도의 재미난 스토리가 있어 블러그에 담습니다.


 
 드라마 [정조 이산]의 이 포스터 뒷 배경이 되는 국화그림은 어디서 많이 본 듯 한데..
바로 정조대왕의 그림 <국화도>인 것이다.

[정조 이산]에서 도화서이야기가 나온다고 하는데, 도화서 화원들 뿐만 아니라 사실 정조대왕 자체가 그림에 뛰어난 사람이다.
한국 미술사의 문인화 부분에 거의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정조대왕의 그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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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의 국화도



가로 51.3㎝, 세로 86.5㎝ 크기의 이 그림은 화면 왼쪽에 치우쳐 그린 바위와 풀위에 세 방향으로 나 있는 세송이의 들국화를 그렸다.
돌과 꽃잎을 묽은 먹으로, 국화잎은 짙은 먹으로 표현하여 구별하였는데, 이러한 농담 및 강약의 조화를 통하여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꾸밈이나 과장없이 화면을 처리한 점은 다른 화가의 그림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징으로 파초도(보물 제 743호)와 함께 몇 점 남지 않은 정조의 그림으로 회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아래는 정조대왕의 다른 그림인 <파초도>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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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의 파초도


이 그림은 가로 51.3㎝, 세로 84.2㎝ 크기로 단순하면서도 균형적인 배치를 보여준다. 먹색의 짙고

옅은 정도 및 흑백의 대조는 바위의 질감과 파초잎의 변화를 잘 표현하였다.

그림 왼쪽 윗부분에 정조의 호인 ‘홍재’가 찍혀 있다.

형식에 치우치지 않은 독창적인 묘사가 돋보이는 이 그림은 글씨와 그림 및 학문을 사랑한 정조의 모습과
남종화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국화도 (보물 제744호) 와 함께 조선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정조대왕은 그림 뿐 아니라 목각에도 취미가 있어서, 도장파는 것도 즐겼다 하는데..
혹시 저 낙관의 도장들도 직접 새긴 것일까?
도화서 이야기에 대한 것은..
얼핏 그림 그리는 곳에 뭐 대단한 흥미거리가 있을까 싶지만, 사진이 없던 그 옛날, 모든 기록은 그림으로 남겨져야 했다고 한다.

특히 정조대왕과 같이 철저한 기록정신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에게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정조시대에 우리나라는 정보강국으로 떠오르게 되었는데, 그것이 세밀하고 자세한 기록과 그림(도화서를 중심으로 한) 들을 바탕으로 이루에 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당시 도화서는 거의 요즈음의 국정원정도 되는 곳이 아니었을까?

유명한 김홍도, 신윤복들이 모두 정조시대에 활동했던 사람들이고, 그 시대에 도화서의 역할이 강화된 것이 사실인 점을 생각하면, 이병훈 피디가 도화서를 주요 무대로 삼은 것도 주관적인것 만은 아닌 듯 하다.

김홍도와 정조대왕이 인연을 맺은 것은 세손시절부터이다.
김홍도가 강세황의 추천으로 도화서 화원이 되었고, 세손시절 정조의 어진 (왕의 초상화) 을 그리는데에 참여함으로써정조의 총애를 받기 시작한다.
김홍도는 정조가 즉위한 이후 도화서의 중심인물로 떠오르게되고, 정조는 '그림에 관한한 김홍도에게 일임'한다..는 취지의 말까지 할 정도로 김홍도의 재능을 아꼈다.
그만큼 정조에게 심미안이 있었으므로 김홍도 같은 천재를 알아 볼 수 있었던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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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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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의 초상화

김홍도는 정조의 특명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정보를 수집, 일본 지도를 완성하여 바치기도 했고,
(굳이 말하자면 스파이의 임무를 띄었다고도 볼 수 있을까..?)

또 정조대왕이 금강산을 가 보기를 그토록 소원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임금의 신분으로 궁궐을 오래도록 비우고 금강산을 굽어 보러 간다는 것이 여의치 않으므로,
김홍도를 시켜서 특별히 금강산을 샅샅히 여행하게 하고 그 그림을 그려오게 한다.
이 명을 받고 김홍도가 정조에게 금강산도 를 그려서 바치는데, 정조는 이 그림을 수시로 꺼내 보며 즐겼다고 한다..
그런데 이 그림을 정조의 사후 순조가 정조의 사위 (수빈 박씨가 낳은 옹주) 에게 하사하였는데 그 가문에서 전해 내려오다가 그만 몇대 후에 행방이 묘연해 져서 지금은 전해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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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경대 (1788) ]

정선이 그린 금강산 그림과 비견되고 있는 김홍도의 금강산 그림인 명경대. 그 또한 금강산 관광 후에 이 그림을 그렸는 데요. 정선이 실제로 경치를 마주하고 나서 자신의 감정을 담아 그림을 그린 것에 비해 김홍도는 자신의 감상보다는 실제의 모습을 중시하여 그림을 그렸습니다. 과장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린 금강산은 실로 절경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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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서루 (1788) ]

이 그림도 김홍도가 금강산을 그린 <금강사군첩> 중 한 장면입니다. 지도를 그린 것처럼 매우 정확하고 사실적으로 그려낸 것이 약간은 건조해 보이기도 합니다. 가로 43센티미터, 세로 30센티미터의 작은 그림이지만 찬찬히 들여다 보면 굽이쳐 흐르는 강물을 끼고 여유롭게 세워져 있는 죽서루의 모습이 결코 작지 않습니다. 작은 비단에 그려진 그림 속 풍경은 매우 넓고 깊습니다.


김홍도는 나중에 낮은 신분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정조의 총애로 벼슬이 연풍 현감에 까지 이르게 된다 .
하지만 예술가인 그가 행정직에 앉아서 관리가 되었으니 어려움 또한 많았다.
그가 연풍 현감으로 있을 때에 그 고을에 기근이 있어서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었는데..
이때 김홍도는 어찌어찌하여 스스로 자금을 마련하여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고 하는데,
이 '어찌어찌하여..'의 대목이 약간 미스테리이다.
중앙정부의 지원을 받은 것도 아니고, 그 자신이 많은 재산이 있지도 않았다고 하는데 말이다..

이와 관련하여 미술계에는 재미있는 설이 주장되고 있기도 하다.
김홍도가 일본의 전설적인 천재 화가 토슈사이 샤라쿠와 동일인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샤라쿠는 일본의 풍속화가 인데 여러가지로 미스테리가 많은 인물이다.
어느날 혜성같이 나타나서 딱 한해 동안 그것도 단 몇개월 동안 수 많은 작품을 남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하는 사실, 아무도 그가 어디서 왔는지, 생몰년을 알지 못할 뿐더러, 그의 본명도 알지 못한다.

아무튼 샤라쿠의 그림들을 보면 매우 해학적인 분위기가 있다.

김홍도의 그림과 스타일이 비슷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김홍도 같은 천재라면 얼마든지 자신의 스타일을 감추면서도 그런 뛰어난 작품을 그릴 수 있다고 보인다.
그의 용주사 벽화를 보면 우리가 아는 김홍도의 풍속화와는 너무도 다른, 마치 미켈란젤로나 다빈치의 그림 같은 느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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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라쿠의 작품 

토슈사이 샤라쿠(東洲齊寫樂)가 그린 ‘Morita Kanva’



























샤라쿠의 작품

왼쪽은 '오하시(大橋)의 소나기', 오른쪽은 고호가 그린 ‘비내리는 다리’

당시 유럽의 화가들이 일본 ‘우키요에’ 화풍에 영향을 받았음을 알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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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가 그린 용주사의 후불탱화


 










그래서 그 미술사학자의 주장은 김홍도가 정조의 특명을 받거나 또는 특별한 사연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스파이 활동을 하면서 그 활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샤라쿠라는 이름으로 풍속화를 그려 팔았고,
샤라쿠의 활동시기가 김홍도가 연풍 현감으로 있으면서 행방이 묘연 했던 그런 시기가 있는데 바로 그 시기와 겹친다는 것 등..

여러가지 증거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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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군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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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슈사이 샤라쿠(東洲齊寫樂)가 그린 ‘Bando Mitsugo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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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요에의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가츠시카 호쿠사이가나가와 앞바다의 파도

여기에 영감을 얻어 프랑스의 작곡가 드뷔시는 교향곡 <바다>를 완성했다고 한다.


 


 

김홍도와 샤라쿠(寫樂)가 동일 인물이라는 이유


(1) 샤라쿠(寫樂)의 그림 중에는 일본어로 해석하기 한시(漢詩)가 있는데, 이것을 이두(吏讀) 식으로 해석해야 뜻이 통하는 경우가 있고, 또 글 속에 자신의 호인 '단원(檀園)'을 가르키는 의미가 숨겨져 있다 점


(2) 김홍도의 그림 중에는 발가락 6개의 부처가 많은데, 샤라쿠(寫樂)의 부처 그림에도 발가락 6개의 부처가 있다는 점

 
3) 샤라쿠(寫樂)와 김홍도의 필선(筆線)의 특징으로 붓 끝이 꺾여 올라간다는 점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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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 매화도와 글씨


정조 즉위년 정유작(정조 재위년간:1777-1800). 정조대왕은 조선조 22대 왕으로서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소생이다.
부친이 비극의 죽음을 당한후 영조(英祖)의 후사가 되어 1776년 25세의 나이로 왕이 되었다. 즉위하자 곧 규장각을 설치하고 탕평책을 계승하였다. 주로 규장각을 통해 문화사업에 힘썼으며, 남인(南人)계통의 실학파와 노론(老論)계통의 북학파 등 諸학파의 장점을 두루 수용하였다. 또 평민,중인계층의 신분상승도 적극 지원하였다. 왕으로서 깊은 학문과 예술적 소양을 가졌던 드문 군주로서 그의 치세하에 조선후기의 문예부흥기를 이루었다. 정조대왕은 할아버지 영조, 부친 사도세자의 성품을 이어받아 그림 취미가 깊었는데 가끔 직접 그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작품이 전하는 것은 아주 드물다. 본 작품은 즉위한 이듬해인 1777년, 26세때 그린 작품이다. 화면 가득 큰 매화가지를 V자형으로 그리고 그 중간에 題를 썼는데, 작은 외숙에게 드린다는 내용이다. 젊은 君王의 그림답게 필치에 날카로운 힘과 기백이 들어 있다. 참고로 동국대 박물관 소장의 파초도(芭蕉圖), 묵란도(墨蘭圖)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데, 본 작품보다 後期의 것으로 필치가 훨씬 부드러워져 있다.

홍낙인의 부친 홍봉한은 18세기 매사동인으로 활동한 李鳳煥이나 南玉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매화에 대한 관심도 많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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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한글편지

숙모님 앞(외숙모?)
상풍에 기후 평안하신지 문안을 알기를 바라며 뵈온 지가 오래되오니 섭섭하고 그리웠는데, 어제 봉서를 보고 든든하고 반가우며 할아버님께서도 평안하시다고 하니 기쁩니다.
원손(元孫)








어차피 블로그 게시물은 90%이상이 펌앤 카피인데
자신의 것인인양 게시물을 올려놔서 펌한 사이트는 게시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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